日本电影论·11周资料·朝鮮人と我们(关了剑词)のステレオタイプはいかに形成されたか
스크린 속의 타자(일본 영화는 살아 있다(제4권)
이와나미 서점/2010
조선인과 중국인의 스테레오타입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몬마 타카시
일본 영화에는 오래전부터 이웃 나라의 인간이 등장했으며, 그 필두는 중국인과 조선인이 다. 그러나 동시에 이웃 나라이면서도, 그 표상이 이루어지는 방식에는 차이를 보인다. 양자는 전쟁 전후를 통해, 그리고 또 현재까지 스테레오타입화 되어 그려져 왔다. 그 차이에 대해 말 하기 전에 양자 표상의 대략적인 역사적 변천을 간단히 더듬어 두고 싶다.
1 전쟁 전・전쟁 중의 조선인상
조선인이 일본의 극영화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전후의 일이다. 타사카 토모타카 감독의 『이 어머니를 보라』(1930)에서는 도시 빈민가에 조선인의 모습이 보인다. 당 시의 사회 상황으로서는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한일병합의 성과를 부정할 수 있기 때 문에 내무성의 검열에 의해 463미터나 잘려 나갔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낙제는 했지만』 (1930)에서 졸업시험 합격자 이름이 적힌 벽보에 분명히 조선인으로 보이는 이름을 한 명 확 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등장인물로서가 아니라 이름만으로 그 존재가 나타나고 있다.
조선인이 대사가 있는 등장인물로 등장한 가장 빠른 예로 여겨지는 것이 오카자키 렌지 감독의 『박애(隣人愛)』(1930년대)이다. 내용은 조선에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려고 했다가 좌 절한 일본인 부부의 고아를 마음씨 좋은 조선인 이만추(박재원)와 아내(김소영)가 맡아 키운다 는 내용인데, 이 영화도 총독부 검열로 한 차례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
기무라 소지 감독의 『히코로쿠 크게 웃다』(1936)에서는 오랜 세월 행방불명되어 있던 아 들 히코이치(마루야마 사다오)가 집에 돌아와 궁지에 빠진 아버지 히코로쿠(도쿠가와 유메나 리)를 구한다. 히코이치(彦一)는 야쿠자에서 갱생하여 타마(多摩)에서 조선인 동료들과 성실하 게 살고 있다고 아버지에게 말한다. 그 조선인은 화면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들이 얼마나 훌륭한 인격자인지가 히코이치의 입에서 열심히 회자된다. 시미즈 히로시 감독의 『아리가토 씨(有りがたうさん)』(1936)에서는 이즈 반도를 종단하는 승합버스의 마음씨 좋은 운전사(우에 하라 켄)가 산길에서 평소 알고 있는 흰 치마저고리를 입은 조선인 여성(쿠하라 요시코)과 말 을 나눈다. 그녀는 도로 공사에 종사하는 조선인 노동자 중 한 명으로, 공사 중 이즈에서 돌 아가신 아버지의 묘를 뒤로하고 다음 현장을 향해 떠나려 한다. 이러한 조선인 노동자 역시 당시 일본에서는 드물지 않은 존재였다. 치바 야스키 감독의 「벽돌 여공」(1940)은, 노자와 후 미코의 수기가 원작으로, 요코하마의 슬럼가를 무대로 한 서민군상이다. 운하 옆 가난한 쪽방 에 사는 소녀 미사(야구치 요코)는 저고리 차림의 아버지(타키자와 오사무)에게 이끌려 전학 온 조선인 소녀 주이(츠바키 스미에)와 단짝이 된다. 가난한 고물상인 주이의 집에 놀러 가면 주이의 부모님께 환영을 받는다. 귀가한 미사는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저 사람들은 가난하지 만 웃을 줄 안다"며 주이 가족의 훌륭함을 설명한다.
이 시대 조선인의 대표적 이미지는 사회 저변을 떠받치는 가난한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그 묘사에 멸시는 보이지 않고 성실하게 사는 인격자로 설정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인 과 일본 국가에 해를 끼치지 않는 안전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도 부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콘 히데미 감독의 『반도의 무희(1936)』는 조선의 저명한 무용가 최승희를 주연으로 한 극 영화이다. 최승희는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제자로 일본을 방문하자 금세 그 재능을 꽃피워 반 도의 무희로 절대적인 인기를 끌었다. 영화는 그녀의 반생을 모델로 한 것이지만, 전쟁 전의 일본에서 조선인이 주역인 극영화라고 하는 것은 아마 이 한 작품뿐일 것이다.
이윽고 전쟁이 격화되자 조선인들도 전쟁에 기여할 것을 기대하며 총을 받드는 황국신민 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받는다. 식민지 통치 말기에 제작된 국책 영화에 등장하는 조선인들은 그 모범상이었다. 이마이 타다시 감독의 『망루의 결사대』(1943)는 조선과 만주의 국경 마을을 공산당 유격대로부터 지키는 경비대를 그린 국책 영화이다. 그곳에서는 조선인들이 모두 일본 인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도요다 시로 감독의 『젊은 모습』(1943)은 조선 징병령을 소재로 한 영화로, 조선인 청년은 하루빨리 황군병사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최인규, 이마이 타다시 공동감독의 「사랑과 맹세」(1945)에서는 조선신문사 편집국장이 아들처럼 돌보는 고아 조선인 소년이 특공대 비행사를 동경한다.
다소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전쟁 전 일본 영화에는 조선인에 대한 노골적인 민 족차별이나 멸시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현실을 그대로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고 이상화 된 모습이다. 2 전쟁 전·전쟁 중의 중국인상
중국을 소재로 한 극영화는 191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요시노 지로 감독의 <서유기(西遊記)>(1917), 오구치 타다시 감독의 <표자두 임충(豹子頭林冲)>(1919), 다 나카 에이조 감독의 <서상기(西廂記)>(1919) 등은 중국 고전을 소재로 한 것으로, 일본 배우 를 이용해 일본 내에서 촬영됐다. 그 밖에도 시마즈 야스지로 감독의 「견고한 악수」(1922)라 고 하는 활극이나, 우시하라 키요히코 감독의 「아! 무정」(1923) 등이 만들어졌다. 미조구치 켄 지 감독도 자주 중국인을 직접 등장시켰다.탐정영화 『813』(1923)이나 『칠면조의 행위』(1924) 는 요코하마나 고베와 같은 항구도시를 무대로 하여, 중국인이나 서양인을 등장시켜 이국 정 서를 다룬 작품이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배금주의를 극단으로 희화화한 『무전부전(無銭不 戦)』(1925)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극단적인 고정관념을 비판받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 영화에 서 중국인의 스테레오타입화는 엑조티시즘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상하이 사변(1932)이 일어난 해에는 군사 영화가 양산되었다. 마쓰이시 오사무(松石修) 감 독의 <쿠가 소령(空閑少佐)>(1932), 가나모리 반쇼 감독의 <마의 상하이>(1932), 이시하라 에 이키치(石原英吉) 감독의 <상하이의 쾌남아>(1932) 등의 작품이다. 1930년대부터는 만주도 일 본 영화에 등장하게 된다. 군사영화로는 요시무라 렌, 쿠마가이 히사토라 감독의 「북만의 정 찰」(1931) 등이 있는데, 좌충우돌 희극 「만몽 야지키타 여행」(1932, 카와나미 료타 감독)이나 멜로드라마 「만주 아가씨」(1932, 와타나베 신타로 감독) 등도 만들어 졌다. 이러한 움직임 속 에서 만주국 성립 그 자체를 다룬 영화로 미조구치 켄지 감독의 『만몽 건국의 여명』(1932)이 있다. 이 영화는 1931년 류탸오후(柳条湖) 철도폭파사건에서 발단되어 군사행동(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이 만주국을 성립시킬 때까지를 긍정적으로 그린 것이다. 영화의 중심은, 왕조 재흥을 목표로 해 싸우는 청조의 공주로, 남장의 여인 등으로 불린 카와시마 요시코가 모델이 다. 만주를 그린 많은 국책영화에서 그곳에 사는 중국인들의 모습은 거의 그려지지 않는다. 이타미 만사쿠 감독의 『새로운 땅』(1937)과 구라타 후민도 감독의 『옥토만리』(1940), 도요다 시로 감독의 『대일향촌』(1940) 등은 개척자 정신을 찬미할 뿐 현지에 살고 있을 중국인 농민 의 존재는 무시되고 있다.
1937년 루거우챠오(盧溝橋) 사건 이후 중일은 전면전 상태가 되었다. 이후의 일본 영화는 중국인에게는 친일과 반일 두 종류가 존재하고, 반일 중국인의 상당수는 일본인의 선의를 일 시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이중적인 이미지를 주게 된다. 일본에 사는 일본인 의 대부분은 그러한 낙관론을 믿게 된다. 루거우챠오 사건 이후 가장 먼저 찍힌 중일 합작영 화는 스즈키 시게요시 감독의 <동양평화의 길>(1938)이다. 토와상사의 가와키타 나가마사가 총지휘를 맡아 전쟁의 뿔씨가 피어오르는 중국에서 로케이션이 진행됐다. 내용은 전쟁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베이징에 사는 사촌 집으로 향한 농민 부부가 일본군 병사와 접촉하면서 일화 제휴(日華提携)의 이념을 알게 된다는 것으로 훗날 대륙물로 불리는 일련의 영화의 선구이기 도 하다. 그런 일화제휴(日華提携)의 이념은 일본인과 중국인의 로맨스를 다룬 극영화에서 그 려진다. 다나카 시게오 감독의 『아세아의 딸』(1938)에서는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중국인 학생 덕희(카와즈 세이자부로)가 루거우챠오 사건을 계기로 상하이에서 보안대에 참가하지만 동포 들끼리의 항쟁을 보고 조국에 환멸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한편으로 전쟁, 한편으로는 중일 우 호를 호소하고 있는 영화이지만, 어차피 중국은 일본의 개입 없이는 다스릴 수 없다고 주장하 고 있다. 구마가이 히사토라 감독의 「상하이 육전대」(1939)에서는, 하라 세츠코가 중국인 피 난민을 연기하고 있다. 그녀는 적인 일본인으로부터 음식을 받는 동포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 윽고 일본의 진의를 알고 마음을 바꾼다. 이 이미지는 나중에 리코란(李香蘭)이 물려받게 된 다.
만영의 스타 리코란(李香蘭)이 출연한 와타나베 구니오 감독의 「백란의 노래」(1939), 후시 미즈 오사무 감독의 「지나의 밤」(1940), 와타나베 구니오 감독의 「열사의 맹세」(1940)는 대륙 3부작으로 불리며 이러한 경향의 정점을 찍었다. 특히 「지나의 밤」은 대히트를 쳤다. 상하이 를 무대로 항일적인 생각을 가진 중국 처녀를 뱃사람인 일본 청년(하세가와 가즈오)이 일본의 선의를 이해시킬 수 있도록 타이른다는 것이 기본적인 줄거리이다. 즉 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 는 것은 일본인의 선의를 오해하고 있는 중국인을 계몽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중국 여성이 자신을 때려눕힌 일본 남성을 사랑하고, 일본인의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을 거듭한다는 이야 기에 일본인 관객은 내셔널리즘을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어느 시기까지의 일본에서 따귀는 애정 표현의 일종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치는 중국에서는 이해될 리도 없어 중국인을 불 쾌하게 했다. 이후에도 시부야 미노루 감독의 「벚꽃의 나라」(1941), 노무라 히로마사 감독의 「소슈의 밤」(1941),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상하이의 달」, 시마즈 야스지로 감독의 「푸른 대 지」 등 일본이 중국을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음을 변호하는 멜로 영화가 이어졌다.
고전적 중국상을 인용한 영화도 있다. 마키노 마사히로 감독의 스펙터클 사극 「아편전쟁」 (1943)은 전시 국책에 부합한 기획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아편전쟁이라는 사실을 현실에 맞 서 싸우고 있는 대영전과 겹쳐놓는다. 그러나 이치카와 사루노스케가 연기하는 린쩌쉬(林則徐) 가 연회석에서 술에 취해 춤을 추는 장면에 당시 상하이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중국인들은 반 발했다고 한다. 고귀한 신분인 린쩌쉬의 처신으로서는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상하이를 방문한 다카스기 신사쿠(반도 츠마사부로)가 중국의 혁명가 이쩌우(翼周)(메이후이(梅惠))와 만 나 한마음으로 뭉친다는, 이나가키 히로시(稲垣浩)/유에펑(岳楓) 감독의 중일합작영화 「봉화는 상하이로 치솟는다(狼火は上海に揚る)」(1944) 또한 현실에서의 중일 연대를 호소하는 것으로, 국책상 바람직한 중국인이 그려져 있다.
물론 중국인은 적으로도 그려진다. 그중에서도 방첩영화에서의 스파이 역할이 눈에 띈다. 코이시 에이이치 감독의 『열정의 날개』(1940)나 요시무라 코자부로 감독의 『간첩 아직 죽지 않았다(間諜未だ死せず)』(1942) 등은 국내에서 암약하는 스파이들을 일본의 관헌이 일소하는 영화이다. 야마모토 히로유키 감독의 『충칭에서 온 사나이』(1943)는 국내 군수공장에 충칭(국 민당)에서 온 간첩이 잠입하여 공장 직원들을 교묘히 꼬드겨 생산 방해를 꾀하지만, 산업 전 사가 몸을 던져 음모를 저지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 등장하는 중국인 스파이 는 충칭 정부에서 파견됐다는 설정이 많다. 고가 마사토 감독의 활극영화 「말라이의 호랑이」 (1943)에 나오는 중국인은 일본 제품을 들여오는 친일적인 화교 상인과 이들을 한간이라 부르 며 탄압하려는 중국 공산당원의 두 종류로, 물론 후자가 악역으로 취급된다. 이 시기 일본 영 화에 공산당계 공작원이 등장하는 것은 드물다.
타이완 주민의 대부분은 한민족이었지만, 일본인들은 소수민족인 고사족(高砂族)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타이완 이미지의 큰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에다마사 요시로 감독의 「애곡 (哀の曲)」(1918), 다사카 토모타카 감독의 「아리산의 협아(阿里山の俠児)」(1927), 치바 야스키 (千葉泰樹), 안도 타로(安藤太郎) 감독의 「의인 고호(義人呉鳳)」(1932) 등이 타이완 원주민을 그렸다. 내지인(일본인)에게 고사족이 타이완의 고정관념이 된 것에 총독부는 분개했다. 미개 한 땅이라는 이미지는 총독부로서는 통치의 성과를 부정당하기에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스 즈키 시게요시 감독의 코미디 「안래홍(雁来紅)」(1934)은, 영국 영화 「Yes, Mr. Brown」(1933) 의 번안이지만, 타이완에 대해서 모던한 이미지를 주었다. 타이완의 제차회사의 도쿄지사장인 주인공이 시찰을 나온 타이완 본사 첸웬시안(陳文賢) 사장(시오미 요)을 접대한다. 이곳에서는 타이완인 사장이 식민지인으로 깔릴 처지가 아니라 상사로서 두려워할 만한 존재가 되고 있 다. 첸 사장은 댄디한 신사로 묘사된다.
타이완과 일본의 일체화를 촉진하는 국책 영화의 정점이 된 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시미즈 히로시 감독의 『사연의 종』(1943)이다. 고사족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일본인 순 경이 출정하게 되고, 그를 사모하는 고사족 소녀 사연(李香蘭)이 짐을 지고 배웅을 하러 가지 만 물살이 빠른 강에 목숨을 잃는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구도는 애국미담으로서는 다소 단순 할 수 있다. 포인트는 이민족이 대동아공영권을 위해 일하는 일본인에게 헌신한다는 데 있었 다.
3 전후의 이미지 변화
전쟁 전부터 전쟁 중까지의 시기의 영화에 등장한 조선인과 중국인을 비교하면 일본의 국 책이나 국제정세 등에 영향을 받으면서 실로 다채로운 이미지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의 패전으로 조선과 타이완은 해방되고 중국은 전승국이 되며 만주국은 붕괴되고 일본제국은 식민지와 외국에서의 권익을 잃었다. 그 후, 일본 영화에서의 조선인과 중국인의 표상은 전환 을 시작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속죄의식을 반영해 이들을 미화하고 그리는 경향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중일전쟁을 회고하는 영화에는 중국인에 대한 속죄의식이 엿보이는 한편 향수의 눈으로 중국이나 만주에서의 체험을 그리는 오락 작품도 많다. 그럼 구체적으로 작품의 흐름을 살펴 보자.
⑴ 전후의 중국인 상
타니구치 센키치는, 타무라 타이지로 원작의 소설 「춘부전」을 각색해 「새벽의 탈주」 (1950)를 감독했다. 비인간적인 군의 내부 기구를 정면으로 비판한 첫 작품으로, 이후의 반전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중국인의 묘사도 흥미롭다. 중국 전선에서 미카미 상 등병(池部良)과 종군위문단 가수 하루미(山口淑子, 李香蘭을 개명)는 뜻밖에도 중국군(국민당 군)의 포로가 된다. 전진훈에 얽매여 있는 미카미는 포로가 된 것을 깊이 부끄러워하며 자결 을 생각한다. 그의 앞에 나타난 중국군의 짜오(趙) 대위(리찌아(黎家))는 세련되고 신사적인 태 도로 자결의 무의미함을 설파한다.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일본 유학 체험 등을 상 기시키는 인물이다. 그의 지적이고 인간적인 행동은 도덕적으로도 우위에 있어 일본군의 비인 간적인 모습과 대비된다.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인간 조건」(1959-61)에는 만주의 탄광에서 가혹한 노동을 하고 있는 중국인 포로들이 등장한다. 소집면제를 조건으로 탄광의 노무관리직 을 맡은 청년 카지(나카다이 타츠야)는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대우를 보고 고뇌한다. 노동자의 리더격인 왕샹리(王享立)(미야구치 세이지)는 논리정연하게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과 일본인 현 장감독의 비리 추궁을 호소한다. 불성실한 일본인과 도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중국인이 강하 게 대비된다.
일본군의 과오를 단죄하기 위해 반전 영화는 중국인을 고결하게 그려왔지만 1950년대 양 산된 많은 전쟁 액션 영화에서는 중국인 여성이 성적 매력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노무라 히로 마사 감독의 「헌병」(1953), 나미키 쿄타로 감독의 「꾸냥과 5인의 돌격병(姑娘と五人の突撃 丘)」(1958) 등에서는 주인공 군인이 중국 처녀에게 농락당하거나 중국 처녀가 목숨을 구하기 도 한다. 이런 신토호 작품에는 전쟁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각은 찾아볼 수 없고 ‘중국인이 일본인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낙관적 희망, 혹은 환상을 볼 수 있다. 노무라 히로마사 감독은 여간첩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 본명 아이신기오로 셴위(愛新覺羅 顯㺭), 중국식 이름 진비 후이(金璧輝))를 모델로 「전운 아시아의 여왕」(1957)을 찍었지만, 여기에서의 가와시마도 미조 구치의 「만몽 건국의 여명」과 같이, 단순한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에 지나지 않는다. 침략에 대한 반성은 희박하고, 엑조티즘만을 알맞게 건져내고 있다.
토호에서는 오카모토 기하치 감독이 「독립 우연대(1959)에서 중일 전쟁을 서부극풍의 액 션·코미디로 완성했다. 그것을 경박하다고 비판하는 평자도 적지 않았지만 작품의 근저에는 일관되게 전쟁의 어리석음을 제시하는 예리한 시각이 있었다. 오카모토는 시리즈 두 번째 작 품인 『독립우연대 서쪽으로』(1960)에서는 프랭키 사카이가 연기하는 팔로군(八路軍, 훗날 인 민해방군) 장교에게 의리와 인정을 중시하는 인간적인 성격을 부여했다(상당히 코믹한 연기이 긴 하지만). 이 이후에는 사에키 키요시 감독의 『사막을 건너는 태양』(1960)이나 에자키 미오 감독의 『도망열차』(1966)와 같이 침략군 측에 몸담으면서도 최대한 성실하게 중국과 마주하려 는 태도를 일본인 등장인물에게 부여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다나카 도쿠조 감독의 『병대 야 쿠자 강탈』(1968)에서도, 종전 직후의 만주를 무대로, 일탈적 인문의 일본병 오미야(카츠 신타 로)가 한눈에 반한 해방군의 여성 장교(사토 토모미)를 위해서, 그리고 일본군의 명예를 걸고 빼앗긴 군자금을 되찾는다. 이것도 하나의 속죄의식의 표시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신중국 과의 국교관계는 1970년대에 들어서기 전까지 수립되지 못하였고, 중일 양국민의 화해를 주제 로 한 작품은 이러한 일본측의 일방적인 추측으로 밖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또 많은 범죄 영화에도 중국인이 등장했다. 닛카츠나 토에이를 중심으로 한 액션 영화에 는 항구도시 등을 무대로 마약이나 권총, 보석 밀수나 인신매매에 관련된 범죄조직이 홍콩 갱 단과 거래를 하거나 항쟁을 벌이는 것이 많다. 우시하라 요이치 감독의 「붉은 권총」(1961), 나카히라 코 감독의 「검은 도박사」(1965), 에자키 미오 감독의 「마카오의 용」(1965)과 같은 닛카츠 작품, 이시이 테루오 감독의 「도쿄 갱단 대 홍콩 갱단」(1964)과 「불량배」(1964) 등의 토에이 작품, 혹은 후쿠다 준 감독의 「100발 100중」(1965) 등 토호 작품이 그러한 예이다. 작 품에 따라서는 중국인이 주인공이라는 예도 있다. 이러한 경향은 1990년대에 이르러, 마스다 토시오(舛田利雄) 감독의 「천국의 대죄」(1992), 바바 아키노리(馬場昭格) 감독의 「극동 흑사 회」(1993)와 같은 중국 마피아물로 부활한다.
국교 관계로 중국 대륙에서의 촬영이 불가능했던 시기에는 중국적인 엑조티시즘은 타이완 과 홍콩에서 대표되었고, 현지에서의 합작 영화와 로케이션이 잇따랐다. 타이완의 중앙전영공 사는 닛카츠와 손잡고 마츠오 아키노리 감독의 반공영화 「금문도에 놓인 다리(金門島にかける 橋)」(1962)를 제작했다. 도쿄의 병원에서 한국전쟁 때 상이병을 치료하느라 바빴던 의사 타케 이(이시하라 유지로)는 타이완 여성 리춘(麗春)(왕머초우(王莫愁))을 알게 된다. 연인인 종군기 자를 잃고 절망하는 그녀를 타케이(武井)는 위로했다. 이후 병원을 그만두고 화물선 선상 의사 가 된 타케이는 몇 년 뒤 기항한 금문도에서 리춘과 재회한다. 그러나 대륙에서 날아오는 포 탄이 난무하는 해변에서 리춘은 목숨을 잃는다. 일본인 타케이는 대륙과 타이완의 대립을 보 면서도 방관자일 수밖에 없다.
타이완에서 촬영된 모리나가 켄지로 감독의 『별의 플라멩코』(1966)는 주인공 청년 사이조 (사이고 데루히코)가 전후 혼란기에 생이별한 타이완인 어머니를 찾는 이야기이다. 그의 앞에 나타나는 타이완인들은 모두 일본어를 구사하고, 영화는 옛 식민지에 대한 향수를 보여주면서 도 일본과 타이완의 관계에 긍정적인 제안을 한다. 당시의 타이완(중화민국)은 일본이 국교 관 계를 유지한 중국이기도 하다.
토호는 1960년대에 적극적으로 홍콩과 합작을 했다. 치바 야스키 감독의 <홍콩의 밤>(1961)은 미국 영화 <모정(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1955)의 번안이다. 특파 원 다나카(타카라다 아키라)는 홍콩에서 중국인 여성 리홍(麗紅)과 만난다. 그녀의 어머니가 일본인이고, 전시 중에 생이별했다는 것을 알게 된 타나카는 후쿠오카에 사는 친모를 찾아낸 다. 리홍(麗紅)은 타나카의 구혼을 받아들이지만, 타나카(田中)는 라오스의 내전을 취재하던 중 사망한다. 치바는 타카라다 아키라와 요우민(尤敏)을 콤비로, 세 편의 영화를 감독했다. 『홍콩 의 별』(1962)도 종합상사 직원 하세가와와 유학생 싱리앤(星璉)의 사랑과 이별을 그렸다. 세 번째 작품인 『호놀룰루·도쿄·홍콩』(1963)에서는, 희극적 요소가 강해져, 결말에서는 약혼에 이 른다. 치바는 이후에도 일본인 의사 츠무라(카야마 유조)와 타이완인 여성 메이란(장메이야오 (張美瑶))의 사랑과 이별을 <방콕의 밤>(1966)>에서 그리고 있다. 츠무라(津村)는 식민지 시대 의 타이베이에서 태어났다는 설정이다. 이러한 합작 영화에서는 중국(타이완)에 대한 향수를 동반하지만, 전쟁이나 식민지 통치라는 과거를 극복하고 화해를 추구하려는 분위기가 느껴진 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돈이 많고 성실하며 착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합작영화라는 성격상 아 시아 지역에서 상영되는 것을 고려해 스마트하고 새로운 일본인상을 제시함으로써 전쟁 시대 의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하기 위한 일종의 전후 처리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일본인과 중국인의 연애에는 리샹란이 여주인공을 맡은 이후 연면히 이어져 온 계보 가 존재한다. 거기에서는, 일본인이 남성이고 중국인이 여성이라고 하는 조합이 많은 것을 차 지해 왔다. 할리우드 영화가 아시아인과의 로맨스를 그릴 때 항상 남성이 미국인으로 설정돼 온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남녀의 역학관계가 그대로 국가관계로 대체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관하지 않다. 식민지와 제국, 혹은 점령지라는 입장은 쉽게 남녀관계(때에 따라서는 주종관 계)에 빗댄다. 치바 야스키 감독의 홍콩 3부작을 리샹란 주연의 대륙 3부작과 비교하면 남녀 조합은 변하지 않았지만 우열관계를 넘어선 중국인에 대한 이미지 개선이 보인다. 물론 중국 이나 홍콩, 한국, 북한의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남녀의 조합은 역전된다. 그 때, 일본인 여성의 스테레오타입화에는 할리우드 영화가 쌓아 올린 이미지가 차용되는 일도 적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과거에 중국인 리샹란으로 배우 활동을 했던 야마구치 요시코가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의 『상하이의 여자』(1952)에서는 전쟁 말기에 일본인 부모를 잃고 중국인의 양녀가 된 경험으로 이중 정체성에 시달리는 인물을 연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일화교를 그리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시부야 미노루 감독의 『바나나』(1960)의 주인 공인 료마(츠가와 마사히코)는 바나나 수입을 하는 부유한 화교 집안의 외아들이다. 이 철부지 료마는 중국어를 하지 않고, 또 무엇 하나 중국인다운 행동을 하지 않으며, 전형적인 일본 젊 은이로 그려진다. 더구나 자신이 중국인임을 숨기지 않는다. 한편 히사마츠 세이지 감독의 「희극 역전반점」(1962)의 주인공들인 요코하마의 화교들은 강렬한 스테레오타입으로 자리 잡 았다. 중국요리점 주방장인 더칭보(徳清波)(모리시게 히사야), 요코하마 중화 거리의 라멘집의 쑨우린(孫五林)(반 준자부로), 무역상인 저우시팡(周四方)(프랭키 사카이), 이발소의 젠툰시에 (珍屯謝)(미키 노리헤이) 등은 모두 중국 억양의 익살스러운 일본어를 구사하여 스테레오타입 의 강화에 힘쓰고 있지만, 공개 당시의 선전용 프레스 시트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차별로 받아 들여지지 않도록 서툰 일본어를 선전에서는 자제할 것이 지시 받았다. 쑨과 일본인 아내 토메 (오토와 노부코) 사이에는 딸 쿠미코(오오조라 마유미)와 아들 겐타로(타카하시 겐타로)가 있으 며, 이들은 완전히 일본인으로 행세하고 있으며, 미국 영화 「플라워 드럼 송(Flower Drum Song)」(1961)처럼 이민 2세의 정체성에 고민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영화에서 재 일화교의 역사성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고, 이들을 색다른 인물로 기용하고 있는 것으로 만 보인다.
1970년대에 태어난 새로운 스테레오타입으로 중국무술이 있다. 브루스 리 주연의 쿵푸 영 화의 세계적 성공을 계기로 일본에서도 토에이를 중심으로 모방 작품이 등장했다. 일본인이 중국인을 연기하고 중국 무술(일본 가라테와 혼동도 있어 반드시 정확하지는 않다)을 선보이 는 영화는 홍콩 영화의 일본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시이 테루오 감독의 「직격! 지옥권」 (1974)과 야마구치 가즈히코 감독의 「여필살권」(1974) 등에는 수상한 의상을 입은 중국인 무 술가가 등장한다. 과장과 변형이 가득하지만 이 또한 엑조티시즘의 한 형태다.
이 밖에도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의 『베이징의 수박(1989)』처럼 중국인 유학생과의 교류 를 그린 인정 희극에서는 의리 있고 성실한 중국인상이 그려졌다. 또한 후세 미노루 연출의 드라마 <홍콩 드림 내가 사랑한 일본인>(1991)이 반일 감정이 남아있는 1960년대 홍콩을 무 대로 일본인 기사와 중국인 여성의 만남과 이별을 그리고, 마츠오카 타카하루(松岡孝治) 연출 의 드라마 <대지의 아이>(1995)가 중국 잔류 고아 청년의 반생을 그린 것처럼 역사적인 주제 로 중국인과의 상호 이해를 그리는 경향의 작품도 제작되었다. 이것들은 역사를 언급하면서, 실제의 중국상을 찾으려고 시도한 것이다.
⑵ 전후의 조선인상
전후 일본영화에서 조선인은 순종적이고 차분한 식민지인에서 일본제국의 피억압자였던 비극의 민족으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그 첫 번째 예는 BC급 전범의 문제를 다룬 고바야시 마 사키 감독의 <벽 두꺼운 방>(1956)이다. 여기에는 과거 일본군의 군속이었기 때문에 전범이 된 조선인 허(이토 유노스케)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전범으로서의 죄를 받아들이고 있는 온 화한 인물로 묘사되면서, 더 상층부에 진정한 전범이 있음을 조용한 분노로 같은 감옥 내의 일본인에게 설파한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중일전쟁을 주제로 한 일본 영화는 많지만 조선 지배를 그린 작품은 적다.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인간의 조건』에서 만주의 탄갱에서 중국인 노동자의 탈주 도와주는 조선인 장명찬(사잔카 큐), 혹은 고모리 키요시 감독의 『대학 살』(1960)에서 관동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학살당하는 무고한 조선인들의 모습이 나타나는 정 도이다. 식민지의 종말로 인해 이전까지 제국의 동포로서의 일체감을 가졌던 조선인의 이미지 는 급속도로 희박해졌다.
1950년대 후반부터 가장 자주 영화에 등장하는 조선인은 재일조선인이었다. 일본에서 태 어난 세대는 전쟁 전에 일본에 간 세대와는 다른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역시 가난 속에서 밝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등장했지만 동시에 민족 차별을 받고 있는 현실도 그려졌다. 재일조선인이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는 영화는 이 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치다 토무 감독의 「막바지(どたんば)」(1957)는 작은 탄갱에서 일어난 낙반사고를 둘러싸고 갱내에 갇힌 갱부의 구조작업과 관련된 일본인과 한국인의 불화를 그린 것이다. 그 불화란 물론 일본인의 차별의식에 기인하는 것이다. 모리조노 츄 감독의 교육영화 『어머니와 소년』(1958)은 가난한 탄광 거리에서 조선인 김 어머니(키타바야시 타니에)가 고아가 된 일본인 소년 이치로(一一郎) 를 맡아 키우는 이야기이다. 조선인의 아이가 되었기 때문에 이치로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 한다. 김 어머니는 괴롭힌 아이의 집을 찾아가 민족차별은 안 된다고 호소한다. 이런 교육영 화가 제작된 것도 현실에 아이들 사이에 차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치즈키 유코 감독의 『바 다를 건너는 우정』(1960)도 민족차별 문제를 다룬 교육영화로 제작되어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 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이 민족의 마음을 되찾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같은 반의 조선인을 놀리던 주인공 유키오는 사실 자신도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아버지(가토 요시)로부터 듣고 충격을 받지만 선생님(야노 센)과 급우들의 격려로 활기를 되찾고 조선학교로 전학해 민 족교육을 받고 이윽고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간다.
이 시기 조선인의 이미지를 가장 강하게 형성한 영화 중 하나는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니안짱>(1959)이다. 사가의 탄관 마을을 무대로 아버지를 잃은 조선인 형제들이 어깨를 맞대 고 사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마무라는 주인공들이 조선인임을 의식적인지 그다지 강조하지 는 않는다. 그러나 장남 키이치(나가토 히로유키)가 탄광에서 정리해고 당하는 배경에는 민족 차별이 역력하고, 어린 동생들을 맡긴 숯쟁이 집에서 질린 식사가 매운 맛을 내는 조선 요리 라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 또 탄광마을 동포들끼리는 상조정신이 충만해 가난하지만 열심히 성실하게 살고 있다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강조된다. 우라야마 키리오 감독의 『큐포라가 있는 거리』(1962)에도 재일조선인이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의 조선인의 이미지 또한 순박하고 일본인들 사이에 있는 차별의식이 비판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주인공 준(요시 나가 사유리)은 이유 없이 조선인을 깔보는 아버지(토노 에이지로)를 강하게 타이른다. 조선인 동창 요시에(스즈키 미쓰코)의 일가가 귀국 사업으로 북한에 가게 되면서 준은 힘든 이별을 겪는다. 준의 동생 타카유키(이치카와 요시로) 또한 요시에의 동생 산키치(모리사카 히데키)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발 벗고 나서서 산키치에게 민족차별을 한 급우에게 보복을 한다. 우라야 마는 촬영 전 시나리오를 재일조선인들에게 읽어주고 의견을 구해 현실 생활 감각과의 어긋남 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이 멜로드라마에는 한일기본조약이 맺어진 해에 찍힌 속편이 있다. 노무라 타카시 감독의 「미성년·속 큐폴라가 있는 거리」(1965)이다. 일하면서 정 시제 고등학교에 다니는 준은 귀국한 요시에의 사촌오빠인 조선고등학교의 사이 이치로(崔一 郎)(테라다 마코토)를 알게 된다. 준은 이치로와 함께 요시에의 어머니 미요(스가이 킨)를 찾아 가 병으로 쓰러진 요시에의 아버지를 위해 북한행을 재촉하지만, 자신의 남편이 조선인이라면 일본을 버리고 갈 각오가 되냐고 역으로 질문받은 준은 할 말을 잃는다. 순진한 준은 비로소 민족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비판하지만, 36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마이 타다시 감독의 『저것이 항구의 등불이다』(1961)는 일본에서 태어난 2세의 정체성 에 대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파고든 작품이다. 이승만 라인을 둘러싸고 한국 정부의 나포에 겁을 먹고 조업하는 일본 어민들에 섞여 조선인임을 숨기고 배에서 일하는 재일 2세 청년을 주인공으로 함으로써 <반일본인>으로서의 재일의 존재를 조명하고 있다.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히데오(에하라 신지로)는 출신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그러나 출신을 밝힌 히데 오는 일단 동료들이 따듯하게 맞아들이지만 배가 한국 경비정에 나포됐을 때 쉽게 배신당한 다. 일본에도 한국에도 귀속될 수 없는 재일조선인의 경계적 입장을 선면하게 그렸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TV 다큐멘터리 <잊혀진 황군>(1963)에서 일본 정부의 보상을 받지 못하는 조선인 상이군들을 찍고 한국인 소년의 일기를 바탕으로 <윤복이의 일기>1965)를 찍 었다. 오시마는 식민지 지배로부터 한국의 현재, 그리고 재일 문제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일 본과의 관계에서 조선 문제를 의식적으로 다루어 온 예외적인 감독이었다. <교사형>(1968)은 재일에 대한 차별 문제를 사형제도의 옳고 그름과 함께 주제로 한 영화이다. 형장에서 기억을 잃은 조선인 사형수를 앞에 두고 벌어지는 그로테스크한 소동은 기존의 조선인의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조선에 대한 일본인의 무관심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그 밖에도 오시 마는 『일본춘가고(日本春歌考)』(1967)나 『돌아온 주정뱅이』(1968) 등에서 조선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맞거울(뒷모습을 보려고 앞뒤에서 거울을 비추는 것)로서의 일본을 그렸다.
전쟁영화에 조선인이 등장하게 된 것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의 일이다. 그래서 일본의 지배에 대해 저항하는 조선인의 모습이 비로소 그려지게 되었다. 이 긴 전후의 시간 속에서 식민지 체험은 망각의 저편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타니구치 센키치 감독의 「새벽의 탈주」에서 이향란이 연기한 하루미는 조선인 위안부이라 는 설정이었지만, 영화에서는 위문단의 일본인 가수로 바뀌어 있었다. 이는 점령군의 검열에 의한 것이다. 스즈키 세이준 감독은 「새벽의 탈주」를 「춘부전」(1965)으로서 리메이크 했을 때, 하루미를 위안부로 할 수 있었지만, 회사의 방침으로 일본인이라고 하는 설정이 되어 버 렸다. 그러나 동시에 조선인 위안부도 등장시켜 그에게 주인공들의 행동을 비판하게 만들고 있다.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의 『독립우연대』에는 소탈한 조선인 위안부의 타케코(타카키타 치 에코)가 등장한다. 조선 억양으로 말하는 그녀는, 전쟁터에서 번 돈을 밑천으로 다방을 개업하 는 꿈을 이야기한다. 『독립우연대 서쪽으로』에서도 같은 이미지의 위안부가 등장한다. 여기에 는 비극적 이미지는 없고 오히려 씩씩하게 사는 천진난만한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쿠마이 케 이 감독은 『땅의 무리』(1970)에서, 식민지 지배로 상처받은 조선을 조선 여성으로 은유한다. 피폭자, 미해방 부락, 미군기지 문제 등 일본이 안고 있는 다양한 차별이 등장하는 이 작품에 서 미해방 부락 출신의 우난(스즈키 미즈호)은 전쟁 전 탄광에서 일하는 조선인 여성을 임신 시켜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때문에 자신을 계속해서 가책한다. 이 여성은 청산되지 않은 일본 의 죄책감이 투영된 조선을 상징하고 있다.
이노우에 아키라 감독의 『육군 나카노 학교 개전전야』(1968)에는 조선인 간첩이 등장한 다. 나카노 학교의 시이나(이치카와 라이조)와 동료들은, 중요한 군사 기밀을 미국・영국의 첩 보 기관에 누설하고 있는 협력자가, 친하게 지내던 아키코(코야마 아키코)인 것을 밝혀낸다. 시이나(椎名) 앞에서 그녀는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는 스파이임을 인정한다. 분명하게 밝히지 는 않았지만 그녀가 독립투쟁에 참여한 조선인임은 분명하다. 야마모토 사쓰오 감독의 『전쟁 과 인간』(1970-73)에도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는 조선인 빨치산들이 등장하는데, 야마 모토가 이들에게 강한 공감대를 갖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대장 서재림(치이 타케오)은 3・1 운동으로 가족을 살해당한 이래 일본인을 격렬하게 증오하고 있다. 이들 소대는 설원에서 만 주국군 부대와 조우해 많은 동료를 잃는다. 서가 동지의 시체를 짊어지고 설원을 걷는 장면에 서는 조선말로 민족의 가혹한 운명을 이야기하는 긴 대사가 있어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는 북한의 항일 영화를 참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마음 먹은 그대로 행동하는 성 격으로 노래를 좋아하는 서의 캐릭터는 조선인의 고정관념 중 하나이다. 모리카와 토키히사 감독의 『내 청춘의 시절』(1975)는 식민지 조선의 지방도시를 무대로 하고 있다. 조선인을 착 취하는 마을의 유력자인 카미조(미쿠니 렌타로)의 부하 박(이가와 히사시)은 항일 게릴라인 정 체가 드러나자 헌병대에서 고문을 당한다. 매달린 채 숨이 끊어지면서도 박은 조선말로 조선 독립만세를 외친다.
야마다 텐고 감독의 『맨발의 겐』(1976)에는 전시 때 히로시마에 근로 동원된 조선인이 등 장한다. 겐(사토 켄타)과 누이 히데코는 아버지 다이키치(미쿠니 렌타로)가 전쟁 반대라는 말 을 해 경찰에 연행되었기 때문에 급우들로부터 비국민으로 불리며 창피를 당한다. 조선인 박 (시마다 준시)은 겐의 아버지를 존경한다며 두 사람을 위로한다. 훗날 아버지의 석방을 축하하 기 위해 쌀을 배달하러 온 박씨에게 아버지는 깊이 감사한다. 오랜만에 흰 쌀밥에 들뜬 겐은 의미도 모른 채 조선인을 조롱하는 우스꽝스러운 노래를 부른다. 아버지는 격분하여 겐을 혼 내면서 조선인의 처지와 그 원인을 만든 일본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쟁이라는 광기의 시대에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겐의 부모와 박씨뿐이다. 우라야마 키리오 감독의 <청춘 의 문>(1975)에서는 탄광에서 일하는 조선인 김주열(가와라사키 초이치로)이 등장해 일본인의 차별을 단호히 물리치고 인간으로서 주인공 신스케와 함께한다.
한편 조선인들이 공포의 대상이었던 시대를 그리는 작품도 나타난다. 그 대부분은 전후의 혼란기를 무대로 한 야쿠자 영화가 많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조선인을 악역으로 묘사하는 것 은 아니다. 카토 타이 감독의 『남자의 얼굴은 이력서』(1966)에는 조선인 야쿠자와의 항쟁이 그려진다. 구천동맹의 유성원(우치다 료헤이)은 일본의 패전을 계기로 일본인에게 복수하고자 하며 시장을 장악한다. 일본인 상점은 조선인의 괴롭힘을 받는다. 이름뿐인 지주인 의사 아마 미야(안도 노보루)도 협박을 받는데, 구천동맹의 최문희(나카타니 이치로)는 과거 전쟁터에서 함께 했던 아마미야와 민족과 입장을 초월한 신뢰관계를 구축한다. 야마시타 코사쿠 감독의 『일본 폭력열도 케이한신 살인 군단』(1975)에서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조선인임은 한 번 도 분명하지 않지만 화면 곳곳에는 그 사실을 시사하는 기호가 흩어져 있어 재일조선인의 성 공과 좌절을 공감대를 담아 그린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야쿠자의 무 덤·치자꽃」(1976)에서는, 일탈적 형사와 재일조선인 야쿠자와의 우정이 그려진다. 이러한 장르 에는 대립과 반목 속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우정과 신뢰로 맺어진다는 설정이 많이 나타난 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에 걸쳐 재일 영화인이 재일을 그리는 작품, 재일 작가의 소설 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 등도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재일의 이미지는 크게 변화한다. 빈곤이나 범죄, 그리고 식민지 시대라는 어두운 이미지가 희박해지고, 또 본명을 숨기고 조용히 살고 있다는 스테레오타입에서 가시화된 존재가 된 것이다. 그 선구적인 존재로 재일 최초의 영화 감독 이학인이 재일 조선인 청년의 고뇌를 그린 『이방인의 강』(1975)이 있고, 그리고 조선인 고등학생이 등장하는 이즈츠 카즈유키 감독의 『악동 제국』(1981), 재일 2세 청년과 일본인 소 녀의 사랑과 이별을 그린 오구리 고헤이 감독의 『카야코를 위하여』(1984), 재일 소녀 준코와 일본인 청년의 연애를 그린 김우선 감독의 『윤의 거리』(1989)가 그 뒤를 이었다. TV 드라마 에서도 주인공 중 한 명이 북한으로 귀국하는 장면을 애절하게 그린 스기타 시게미치 연출의 「1970 우리들의 청춘」(1990)과 김희로 사건을 다룬 오다기리 마사아키(小田切正明) 연출의 『김의 전쟁』(1991) 등이 제작되었다. 그 중에서도 최양일 감독의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1993)의 히트는 재일 이미지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조선고 학 생을 주인공으로 한 이상일 감독의 청춘 영화 「청~chong~」(1999), 재일 작가 카네시로 카즈 키의 소설을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이 영화화한 「Go」(2001), 재일한국인 고등학생을 그린 구수 연 감독의 「우연히도 최악의 소년」(2003) 등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이즈츠 가즈유키 감독이 1960년대 후반을 무대로 조선고와 일본 고교 소년들의 사랑과 싸움과 우정을 그리는 「박치 기!」(2004)를 찍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재일조선인이 영화의 등장인물로서 익숙한 존재가 되 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은 폭력적인 스테레오타입을 쌓았다는 측면도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월드컵 공동 개최의 영향으로 일본에서 이른바 한류 붐이 일어나 영화나 드라마 기획이 급증했다. 재일이 아닌 한국의 한국인과의 만남을 그리고 있는 것이 이 시기의 경향이다. 호시다 요시코가 연출한 TV 드라마 <한번 더 키스>(2001)에서는 음악가를 지향하는 일본인 청년 아유무(쿠보츠카 요스케)와 한국인 여성 가수 레이카(윤손하)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TV 드라마 '프렌즈'(2002)에서는 일본인 직장인 토모코(후카다 쿄코)가 여행지인 홍콩에서 한국인 청년 지훈(원빈)과 만나 서로에게 끌리지만, 여러 가지 벽이 가로막혀 둘은 맺어지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한일 공동제작이기 때문에 서로의 나라의 관습이나 사정(예를 들면 일본에는 없는 징병제도 등)을 소개하는 요소가 강하다. 후지타 메이지 연출의 드라마 <결혼의 조건>(2002)은 한일 국제결혼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일본인 청년(이나가키 고로)과 한 국인 여성(김윤경)이 한국에서 만나 결혼하지만, 양측 가족의 반대를 받는다. 한일 국제결혼을 둘러싼 장애물을 그린 작품은 드물다. 또 선로에 추락한 승객을 구하려다 희생된 한국인 유학 생을 모델로 한 『당신을 잊지 않겠다』(2006)가 하나도 준지(花堂純次) 감독에 의해 제작됐다.
양자의 이미지 비교
한국인과 중국인의 이미지 표상에 있어서는, 엑조티시즘의 본연의 자세에 차이를 볼 수 있다. 일본 영화에서 중국인을 그릴 때는 비교적 의상, 언어, 요리, 음악, 무술 등 중국 문화 를 쉽게 상기시키는 요소를 담는 경우가 많다. 중국 여성들은 시대 설정을 무시하고 치파오, 이른바 차이나 드레스를 입는 경우가 많다. 남자라면 메기 같은 수염을 하고 있기도 하다. 조 사를 생략한 외마디 일본어를 중국식 억양으로 말하고 아이야!(哎呀!)를 연발한다. 라면(엄밀히 는 중국 음식이 아니다)을 먹고 징 소리를 많이 사용한 음악이 사용된다. 그 으뜸가는 것은 중화거리이다. 내면적인 것보다 외모적인 이미지가 우선이다. 물론 그 대부분은 현실의 중국 문화와는 큰 차이가 있고, 스테레오타입화된 이미지임은 말할 것도 없다. 또 그 스테레오 타 입의 대부분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려져 있는 것과 공통되고, 일본 영화도 거기에서 많은 것 을 차용해 왔다.
한편 조선인을 그릴 때는 중국인에 대해 행해지는 외견상의 스테레오타입화는 그다지 현 저하지 않다. 예를 들어 민족의상인 치마 저고리를 입는 사례도 있지만 의상에 따른 구별은 차이나 드레스만큼 빈번하지 않다. 조선인 등장인물들은 탁음이나 반탁음의 발음이 어긋난 듯 한 사투리로 일본어를 구사하며 '아이고'를 연발한다. 차이나 드레스는 여성 등장인물을 섹시 하게 혹은 코믹하게 보이게 하는 경우가 많지만, 치마 저고리는 가련함이나 고지식함을 자아 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조선인임을 강조한 아이돌은 등장하지 않았다. 또 한국·조선의 민족적 특징을 과장해 웃음을 취하는 타입의 코미디언도 이상하게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의 이미지를 빌린 예라면, 프랭키 사카이의 연기나, 후지무라 아리히로나 타모리의 성대 모사, 혹 은 마술사 젠지 페킹(ゼンジー北京)이 쓰는 말 등이 알려져 있다. 한국을 형상화한 코미디의 첫 번째 예는 아이돌 가수 쿠사나기 츠요시(草秒剛)가 TV 프로그램 '초난강'(2001-04)에서 연 기한 한국인 캐릭터가 처음일 것이다. 그 배경에는 물론 한류 열풍이 자리잡고 있다. 프로그 램 내에서는 전편 한국어 드라마도 제작해 한국어를 구사한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재일의 이미지를 역이용한 코미디언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의 이미지를 라면이라는 일본식 중국요리가 대표해 왔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하 지만 나라마다 대표적인 중국 음식은 다르다. 한국에서는 자장면(炸醬麵)이 가장 인기 있는 중 국 음식이며, 미국에서는 찹 수이(雑砕)(19세기에 중국 이민자가 고안한 야채볶음)이다. 각각 이 오리지널 중국 요리에서는 상당히 변화한 것이지만, 각 나라의 영화에서 중국의 스테레오 타입을 나타내는 소품으로서 이용된다. 일본 영화에서도 중국 요리는 상당히 견고한 스테레오 타입으로 등장한다. 「바나나」에서도 주인공의 아버지가 항저우 요리를 만드는 모습을 세밀하 게 묘사하는 장면이 있어 중·일 요리 비교론을 펼친다. 『희극 역전 반점』의 주인공들은 요코 하마에 사는 화교 요리사들이며, 『라면 대사』(1967)에서는 중국인 청년 왕(프랭키 사카이)이 본고장의 라면을 끓여 유명하다. 1970년대까지의 일반 일본인들에게는 메뉴의 폭이 아직 좁았 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미식 붐으로 현격히 이미지가 바뀌었고,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중국 요리는 그 이미지를 강화했다. 그러나 조선인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불고기가 등장하는 예는 매우 적다. 『일본 폭력 열도 케이한신 살인 군단』 등에서는, 조선 요리는 변두리의 식당에서 조용히 먹힌다. 또 김치나 하얗게 탁한 막걸리가 이들이 조선인임을 암시하는 소품으로 쓰인 다. 조선 음식을 주제로 한 영화는 구수연 감독의 'The 야키니쿠 무비 불고기'(2006)가 최초 이다.
일본 민족의 호감도 조사에 의하면, 내선일체에 의한 운명 공동성을 공유하고 있던 조선 인은 일본의 패전까지는 매우 높은 호감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39년 일본인 학생 대상의 조사에 의하면, 호감도가 높은 민족의 상위는 ①일본인, ②독일인, ③이탈리아인, ④만주인, ⑤조선인, ⑥몽고인, [중략] ⑬지나인(中国人)이 뒤를 잇고 있다. 전후 1949년의 유사한 조사 에서는 ①일본인, ②미국인, ③독일인, ④프랑스인, ⑤영국인, ⑥이탈리아인이 되었고, 중국인 은 9위로 상승하였으며, 조선인은 15위로 하강하였다. 패전으로 인한 운명 공동성의 소실, 그 리고 점령하에서의 무법 행위 등이 그 이유로 꼽히고 있다. 이후에도 6・25전쟁과 독재정권 등이 호감도를 떨어뜨렸다. 1980년대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호감도는 크게 상승하고 있는 데, 이 배경에는 경제성장과 올림픽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에 반영되기에는 시차가 있다. 반면 중국인에 대한 호감도는 비교적 일정했다. 일본인이 중국에 요구한 것은 엑조티시즘이었 다. 다양한 요리, 유구한 역사, 웅장한 경관, 고전 문학 등 문화에 대한 친밀감이 호감도를 유 지해 왔다. 이것이 변동을 보이는 것은 정치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이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 을 외국인이 아닌 일본의 질서 하에 준구성원처럼 편입시켜 왔다. 자국과 동질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타국'이 아니었고, 심지어는 엑조티시즘의 대상이 되는 '이국'도 아니었다.(3) 이에 반해 중국은 어디까지나 타국이자 이국이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한 것은 식민지 시대의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비로소 한국을 이국으로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 닐까.
민족에 대한 호감도를 나타내는 예로서 이시노모리 쇼타로 원작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사이보그 009」(1968)를 예로 들어 보자. 이 호감도는 인지도나 거리감이라고 바꾸어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홉 명의 사이보그들은 민족, 국적을 달리하지만 아시아인으로는 일본인과 중국인을 포함하고 있다. 006으로 불리는 통통한 몸매의 중국인 남 성 장장코(張張湖)(일본어로 된 말장난임이 분명함)는 입에서 화염이나 열선을 내뿜을 수 있는 데, 이 화염의 이미지는 중국 요리의 주방을 연상시킨다(원작 만화에서 장장코는 요리사였다 는 설정). 그는 대사에 중국의 고사성어를 엮어, 무엇인가 미국 영화에 있어서의 중국인 탐정 찰리 챈을 생각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여서 세리카와 유고 감독에 의한 극장판 「사이보 그 009」(1966)에서의 장의 목소리는, 영화에서 중국인을 자주 연기해 온 배우 후지무라 아리 히로가 담당하고 있다. 003의 프랑수아즈는 프랑스인이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가수이자 여배 우인 주디 옹(翁倩玉)이다. 일본인이 중국인을 연기하고 타이완인이 프랑스인을 연기하는 이 역전 현상은 흥미롭다.(4) 만약 이 만화가 동시대 홍콩과 타이완 만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면 006의 설정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리더 009는 씩씩한 중국인으로 그려지고, 반대로 006에 게는 코믹한 성격 설정을 한 일본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한국에서 그려졌다면 006은 중국인 그대로이고 일본인이 멤버가 되는 일은 피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인이 등장했다면 적의 편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사이보그 009』와 같은 드라마에 조선인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역시 조선인이 이국인으로서의 인식을 많이 받지 못했던 것, 그 때문에 엑조티시즘이 부족하 고 스테레오타입화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외견상 스테레오타입화는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면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으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재일화교와 재일조선인의 등장인물을 비 교해 보자. 재일화교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도 민족적인 정체성을 강하게 보유한 인물로 그 려지지만(<역전 반점> 등), 재일조선인은 자신의 정체성에 구애되어 일본 국적 취득에도 주저 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윤의 거리> 등). 재일화교는 나라를 쉽게 밝히고, 일본인 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바나나> 등). 재일조선인이 국적을 밝히면 주위의 일본인 들은 놀란다(<이방인의 강>, 등). 그래서 고백 자체가 드라마가 되기도 한다. 재일화교 는 일본인과의 연애나 결혼에 주저하지 않지만('바나나', '역전 반점' 등) 재일조선인들은 주저 하는 경향이 있다('박치기', 'Go' 등).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화 내에서의 일이다. 재일조선인 여부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영화에서는 조선인과의 연애나 결혼은 성취하기 어렵고, 중국인과 의 그것은 성취하기 쉬운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영화에 등장하는 조선인 대부분이 재일조선인인 데 비해 중국인은 재일화교 가 아니라 중국이나 홍콩·타이완 거주자이거나 방문자가 대부분이다. 또 재일조선인 영화인이 민족적 정체성을 담은 영화를 찍는 일은 있어도 화교계 영화인이 화교를 주제로 한 영화를 제 작하는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조선인이 일본인과의 차이를 명확히 할 수 없는 딜레마 를 가진 반면, 중국인은 처음부터 이국적인 것이 전제되어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인과 조선인 중 어느 쪽이 더 이상화된 인물로 그려질 것인가. 결론부터 말 하면 크게 다르지 않다. 이상화의 방향이 다를 뿐이다. 전후 중국인을 그린 작품에서는 은의(恩義)라는 감정으로 맺어진 인간관계가 이상화된다. 『홍콩의 별』에서는 여주인공 싱리엔의 도쿄 하숙집 주인인 스기모토(야마무라 소)는 과거 상 하이에서 부상을 당했을 때 싱리엔의 아버지인 의사 왕춘보(王椿伯)(왕인, 王引)의 도움을 받 은 적이 있다. 스기모토(杉本)가 그녀를 소중히 맡는 것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방콕의 밤」에서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과거 타이베이 병원 의사였을 때 수술로 도움을 받은 타이완인 손녀가 할아버지의 대리로 일본을 방문해 주인공의 아버지 묘소를 참배한다. 「라면 대사」에서는 전시 중 생명의 은인을 찾기 위해 중국인 청년이 찾아온다. 적국 혹은 지 배자였던 일본인이기는 하지만, 은혜라는 감정은 불행한 과거를 극복한다. 그러한 영화를 만 든 동기에는 물론 일본인측의 속죄 의식이 있고, 또 중국인의 관용이 일본인을 용서한다고 하 는 묘사에는,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싶은 소망도 담겨 있다. 그것이 민족의 화해를 상기시킨다. 중국인이 일본인에게 보답한다는 이야기는 면죄부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인과의 화해는 영화에서는 민족의 대립을 초월한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남자의 얼굴은 이력서』나 『야쿠자의 무덤·치자꽃』에서의 우정 등을 그러한 예로 들 수 있다. 또 전쟁 전의 중국이나 만주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선 속에 오블라투처럼 싸여 모호하게 존재하지만 조선 지배의 기억은 항일 투쟁을 그린 영화를 제외하면 별로 얘기되지 않는다.
일본 영화에 있어서 중국인상과 조선인상은 공통점도 많다. 그러나 중국인이 기호화된 타 자로 상대화되어 묘사되는 데 반해, 조선인의 존재를 상대화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일본이라는 존재를 비판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촉매 역할을 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 점에서는, 오키나와나 아이누라고 하는 내부의 스테레오타입과의 비교에 대해 검 토되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주 (1)프랭키 사카이나 젠지 페킹이 사용하는 중국풍 일본어는 만주국 건국 초기에 사용된 간이 일본어인 협화어(協和語)가 뿌리로 꼽힌다. 중국어 단어가 섞이면서 용언의 어미 변화와 조사 의 일부가 생략되어 있다. (2)정대균 「한국의 이미지─전후 일본인의 이웃관」, 중공신서, 1995, 2-5쪽. (3)이 책, 13페이지. (4)몬마 타카시 「중화 우상의 변천-리코란에서 비비안 수까지」, 요모타 이누히코 편 「리코란 과 동아시아」, 도쿄대학출판회, 2001, 237 페이지.